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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야기

[영화] 하나의 사건이 세계의 흐름을 변화시킨 이야기, 영화 오펜하이머 후기

by 해삐쏭쓰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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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배경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많은 관심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 수소폭탄, 물리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설명되며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습니다.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저라도 요즈음 시대를 살아간다면 핵, 핵폭발, 원자폭탄 등의 이야기를 모를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오펜하이머를 통해서 이러한 측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누구인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자입니다. 1920년대에 양자물리학이 태동하던 유럽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버클리 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연구를 수행하며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 양자장론, 상대성 이론, 우주선 물리학, 중성자별과 블랙홀에 대해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가장유명하게 만든 일이자 이번 영화의 주된 스토리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원자폭탄을 제조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조하는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고, 그 원자폭탄으로 전쟁은 끝냈지만 더 이상의 전쟁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에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수소폭탄 계획에 대해서도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청문회에 출석해야 했고, 청문회에서 자신의 과거의 삶이 낱낱이 드러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 성격 결함을 이유로 비밀에 접근할 권한이 필요한 모든 공직에서 박탁을 당하고 그의 삶은 20세기 미국의 과학과 전쟁, 과학과 정치의 굴곡진 관계를 극명하게 반영한 삶이자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스앨러모스 실험실과 원자폭탄 프로젝트

물리학계에서는 독일에서 새롭게 발견된 핵분영과 연쇄반응을 이용해서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헝가리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전에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청원했는데, 그때 당신의 가장 큰 기술적 난점은 우라늄-238이 연쇄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1941년 우라늄-238을 연쇄반응하는 플루토늄으로 변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됨에 따라 미국 정부는 '맨해튼 엔지니어 지역'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출범시켰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난관과 과학자들 사이의 엇갈린 의견들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1945년 7월에 두 개의 플루토늄 폭탄과 한 개의 우라늄 폭탄이 제조되었고 두 플루토늄 폭탄 중 하나는 7월 16일에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이 붙은 테스트에서 시범적으로 폭파되었습니다. 첫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을 목격한 과학자들은 그 섬광이 '천 개의 태양보다도 밝다'라고 느낌을 전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순간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린 이 세상이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소수는 울고 또 웃었지만, 대다수는 침묵했다.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비슈누는 왕자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설득하는 중에 자신의 위엄을 떨치기 위해 여러 팔을 펴쳐 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어떻든지 이것을 모두 생각했다고 본다. _ 수소폭탄과 청문회'

 

이후 남은 두발의 원자폭탄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졌으며,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국가적 영웅이 되었지만 그는 원자폭탄의 피해를 목격한 뒤 내면적으로 고통스러워했으며 이후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 사이의 우호적인 공유를 통한 원자력의 국제적인 관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운동은 미국정부의 핵무기 독점을 위한 강경한 태도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후 원자 에너지를 민간차원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정책을 실시하여 1947년 원자력위원의 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원자력위원회의 가장 첨예한 문제는 수소폭탄의 개발문제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저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반대세력에 부딪치기도 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의 수소폭탄의 개발 계획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952년 미국은 첫 번째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라는 투고가 접수되며 청문회를 통해 비밀문서를 취급하는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으며, 사임한 뒤에는 주로 과학이 정치에 의해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현대 사회에서 지식의 힘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1963년 식도암 진단을 받은 그는 1967년 2월 18일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는 하나의 시간대가 아닌 세 개의 시간대로 진행됩니다.

 

#시간대1 

오펜하이머의 젊은 학창 시절부터 맨해튼 계획까지의 시간으로 컬러로 묘사됩니다. 

이때의 시대배경은 독일에서 핵분열 현상이 발견되고, 1년 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반발합니다.

2년의 시간이 지나고  원자폭탄이 완성되기 전 독일이 항복 하지만 일본의 저항이 계속되었기에 맨해튼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됩니다. 이후 포츠담 선언 직전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수행,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투하됩니다.

 

#시간대2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배경으로 컬러로 연출됩니다.

이 시기는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수소폭탄 개발을 저지하는 오펜하이머의 입장과 원자력 협회에서 벌어졌던 오펜하이머 청문회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시간대3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의 청문회로 흑백으로 묘사됩니다.

 

후기

실제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고 가볍지 않은 주제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를 제작할 때 CG 사용을 자제하고 실제 촬영을 행하는 편이라는 것 등의 연출과 관련된 이야기, 영화 자체의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한 측면보다는 숨겨져 있는 것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인간의 딜레마의 상황에 빠지며 항상 선과 악이 공존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것들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절대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본인이 본 것을 본인의 경험과 감정과 사고대로 해석하기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의 질투와 시기의 감정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맞다고 여긴 것이 시간이 흐른 후에는 틀린 것이 되며, 지금 틀리다고 한 것이 후에는 맞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심판자가 될 수 없으며 악한 존재이기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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